대전미술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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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협회의 역사
  • ~1960년대
  • 1970년대
  • 1980년대
  • 1990년대

 

※ 대전미술의 태동기( ~ 1969)

한밭 대전은 차령산맥이 맥(脈)을 이어주는 아름다운 분지로써 가장 평온하고 온화한 중부도시이다. 남서쪽으로는 보문산과 구봉산이 계룡산을 향해 마치 양팔로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는듯 병풍처럼 둘러 싸여있다.  그리고 북쪽으로 갑천이 큰 내를 이루어 금강으로 만나 젖줄이 되어 서북쪽으로 평야를 이루는데 이곳이 한밭 대전이다.

나를 태어나게 해준 고향이란 점도 있지만 오십수년 지내는 중에도 큰 재앙을 당하지 않고 살아온 것을 보면 이곳은 살기좋은 고장이라는 것을 증명해 준 셈이다.  사람들 마음도 넉넉하니 타지방 사람들과도 부드럽게 수용을 잘해서인지 국가 중요 청사가 이곳으로 하나 둘 옮겨오게 되어 전국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는 곳, 그래서 자연스럽게 고급 문화와 고급인력이 더불어 찾아 들어 누구나 한번쯤은 머물며 생활하고픈 광역시로 탈바꿈 되었다.  지나간 세월을 뒤돌아보면 대전의 문화판도가 바뀐 것은 6.25사변이 아닌가 한다.  민족의 대이동을 통하여 한밭 대전은 전국적인 문화양상이 뒤범벅이 되다시피한 가운데 이곳 나름대로의 색깔을 지닌 다양한 문화를 간직하게 되었다.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도, 대전 사람은 서울로, 혹은 타지방으로, 타지방에 있던 사람은 대전으로 이주하여 대전 특유의 전원적인 미술양식이 마치 인도의 서북방에서 꽃폈던 간다라 미술처럼 독특한 지역적 특성을 가질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1945 ~ 1949년을 기점으로 대전에 들어온 작가로는 주로 초ㆍ중ㆍ고에서 미술을 지도하는 교사가 주를 이루었으며 간간히 초상화나 간판을 그리는 상업화가들을 꼽을 수 있다.  한국화가로는 이응로, 이경배, 서양하가로는 이동훈, 박성섭, 김기숙을 들 수 있다.

공주출신 이경배는 문인화에 능하였고 예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한 유랑화가 이응로는 선전에도 특선하고 대전에서 간판사업을 크게 하다가 큰 뜻을 품고 프랑스에 건너가 명성을 얻었다.  그 뒤 동백림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도 치룬뒤 프랑스로 귀화하였다.

동경에서 유학하여 서양화를 전공하였던 박성섭은 청양태생으로 해방 이전부터 대전에 거주하였으며, 선전에서도 입선하였다. 대전 사범학교미술교사로 있다가 상공장려관 관장으로 부임(1947년)함에 따라 그 후임으로 대저공업중학교에 근무하던 이동훈 선생이 대전사범학교로 전입해 왔다.

김기숙의 고향선배인 고 박성섭(1903 ~ 1974)은 최초로 사설 미술협회를 조직하였으며 대전미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다가 1974년 타계했고 그의 손자 박상국은 현재 천안에서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고 있으며 충청남도 도전 초대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1944년에 평안도에서 대전으로 이주한 이동훈(1903 ~ 1984)은 대전공업중학교와 대전사범학교(현 충남고)에 재직하면서 제자 양성과 작품제작에 몰두하였다.  객지 생활에 고독함을 달래기 위해 작품제작에만 몰두했으며 우직한 성품에 키도 크며 웃음소리가 호탕하였다.

이 때 대전공업중학교에 다니던 '임봉재는 곧잘 스승으로 모셨던 이동훈선생이 근무하는 대전사범학교에 청강생으로 공부했으며, 학교부근의 청국 밀밭에서 큰 밀대 모자를 눌러 쓰고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라고 그 시대 대전사범1회 졸업생인 이정식, 권탁원은 회고하였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서 '목장의 아침'으로 특선을 차지하여 대전지방 미술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홍성에서 활동하던 김기숙은 대전으로 자리를 옮겨 여러 학교와 충청남도 학무과 미술장학사로 지내면서 1958 ~ 1961년 까지 충남미술협회 회장직을 맡아 미술교사들을 미협의 주축이 되도록 이끌어 왔다.  또한 한국미술교육 연구회 실행위원으로 「새로운 학생미술」을 저술하여 미술 교육에도 힘썼으며 서울, 인천, 대전에서 6회의 개인전('47, '56, '59, '64, '70, '76)을 개최하였고이 고장 미술인들에게 귀감이 되었다고 스승으로 모셨던 임봉재 회원은 회고하였다.

이인영의 스승인 윤후근 선생은 전주사범 출신으로 선전(1939년 18회)에 출품하였으며 이동훈선생과 더불어 이 지방에 미술교육과 미술협회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1955년 서울의 화단에서는 고희동씨를 회장으로 한 대한 미술협회와 장발씨를 회장으로 한 한국미협이 서로 양분되어 전시회가 따로 열리던 시대였다.  대전에서도 국전 옹호파와 국전 반대파로 나누어 서로간에 갈등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어떻게 보면 견제세력을 통하여 발전의 초석이 다져졌다고도 본다.

1952년 연기군 금남출신 김철호와 부여출신 이인영이 대전에 정착하였고, 이 무렵에 홍동식, 윤후근, 임봉재, 송진세, 유우연, 조영동, 이남규, 이지휘, 박여일이 서양화를 그렸다.  민경갑(호수돈여중고)도 잠시 이곳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이명희(한국화), 권탁원(한국화), 송진세(서양화), 손중성(서양화), 박영홍(서양화), 유우연(서양화)등은 문창동의 도립병원 뒤에 거주하던 이동훈선생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면서 제1회 '미술동인전'(1960. 11. 1 ~ 5 대전문화원)을 개최한 맴버들이 된다.  이들중 권탁원(대전사범1회 졸업)은 선화국민학교에 근무하던 처녀교사로서 국전에 3회 연속 입선을 하여 스승이였던 조중현(한국화)의 기대에 찬 수제자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전한다.

1953년 박성섭, 이동훈, 박승무, 김기숙, 이인영, 김철호, 임상묵 등이 주축이 되어 충남미술협회를 발족하였고 이 시기에 최종태, 임봉재, 이남규, 이지휘, 조영동, 민경갑, 이종수 등이 대전에서 활동한 청년미술가들이었다.  그리고 이해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이동훈의 '목장' 그림이 문교부 장관상을 수상하게 되자 대전미술계에 버팀목으로 새바람을 불어넣어 준 계기를 만들었고 중앙과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교두보가 가설되었다고 본다.  또한 대전 최초의 비구상 계열인 신봉균, 조영동, 이남규, 이지휘는 이 지역에 '추상화'의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다.

1954년 천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주로 천안에 거주하던 김화경(한국화)은 제3회 국전때 '국전 낙선전람회'를 개최한 주동인물의 한 사람으로 그 시대 국전 심사위원들에게 일침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54년 11월 김화경, 정진철을 위주로 10여명이 일반의 냉소를 무릅쓰고 서울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국전에 대한 도전의 전시회였고 심사위원에게 말없는 항의였다'(경향신문 1962년 10월 20일 신문에 게제된 내용)

1957년 부터 박승무(한국화)는 대전에 정착하여 우직한 마음으로 홀로 은둔하여 '설경'작품에 매진하였다.  이 시기에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ㅇ리종상, 유희영, 김인중, 이철주(현 중앙대 에술대학장), 유병창, 윤병화, 최회권, 송순옥, 이근신, 문정수, 송영숙이 주동이 된 '루불 미술동인전'이 활발하였다.  김철호선생과 홍동식선생이 지도하였으며 후에 미술인들은 대전 최초의 고교생'미술그룹전'이라고 말하였다.

1960년대 초 조중현(한국화)은 1959 ~ 1961년까지 대전공업고등학교 미술교사로 봉직하면서 제자양성과 작품활동을 하였다.  이당 김은호의 수제자 중의 하나로 우리나라의 한국화에 한 획을 남겼다.

1960년 제19회 국전에서 최종태는 조소 부문에서 '서있는 여인'으로 문교부 장관상을 수상하였다.

1961년 녹청회전은 한국화에 조중현, 김화경, 한유동(김은호 제자) 서양화로는 김성재, 황진국, 정택은, 김철호(간사) 심죽자, 금동원, 이창호, 윤후근, 이인영은 대전의 상공장려관 뒷길에 위치한 '개미다방'에서 녹청회원전을 개최하였다.

녹청회는 1958년에서 1961년에 있었던 현대미술그룹이며 당시 천안중학교에 재직중인 김화경(동양화), 김성재(당시 천안여중 재직), 조중현, 황진국(조치원여중), 한유동(합덕중)등이 안면도에서 처음 그룹을 결성하였다고 1955년도 충청남도 교육위원회 장학위원이었던 정택은 선생은 그 당시를 회고하였다.  그 결성의 시원을 찾아보면 1950년대 미술 교육의 큰 행사로 합덕중학교에 미술교사로 근무하던 한유동선생이 도 지정학교 연구발표를 하는 현장에서 당시 급진적인 최신의 미술을 하는 작가들이 모여 그룹을 결성하고자 뜻을 모았다고 한다.

그후 첫 현대미술 전시회를 광천의 정거장앞 '십자성 다방'에서 1957년 충남 최초의 '모더니스트'를 자부하는 6인이 모여 전시를 하였고 안면도에서 '워크샵'을 가졌으나 바로 황진국 선생이 장티프스에 걸려 무산되었으며 그 후 천안정거장 앞에 살던 안과의사의 도움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당시의 안면도는 5일에 한번씩 ㅐ가 들어오므로 황진국 선생의 와병중에도 어쩔 수 없이 5일동안 안면도에서 묵으면서 현대미술운동에 대한 논의를 진지하게 한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요약해보면 제1회때에는 김화경(동양화), 김성재(유화), 정택은(도안), 한유동(동양화), 이창호(공예, 옵서버)의 일본 동경 유학팀으로 전시를 치루었고 2회때에는 대전으로 옮겨 대덕구청 자리옆 남양다방에서 대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윤후근, 이동훈, 김철호가 합세하여 김화경, 김성재, 정택은, 한유동, 이창호, 윤후근, 이동훈, 김철호의 본격적인 그룹전을 하였다고 한다.(6회의 녹청회전 끝무렵 국전에서 특선한 이인영이 가입을 하여 전시회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1953년 충남미술협회가 발족한뒤 한국미협 대전지부가 인준될때까지 7회까지 이어온 '충남미협'의 활동사는 다른 지역보다 일찍 출발하였고 1960년도에 출품한 작가들의 행보는 사회의 무관심을 관심으로 이끌었으며 주로 중ㆍ고등학교에서 미술을 담당한 교사들이었다.

1955년 '도 미술 장학위원'이었던 정택은 선생은 색채학과 판화면에 뛰어나 이 지역 미술발전에 공이 컸다고 전한다.(김철호선생 증언)


1960(4293. 11. 11 ~ 15) 7회 美  協  展

분과

참가자

작품명

근무처

이인영(李仁榮)
이지홍(李志鴻)
윤완호(尹玩鎬)
심상규(沈相奎)
황진국(黃鎭國)
임봉재(任奉宰)
이남규(李南奎)
김철호(金哲鎬)
김기숙(金基淑)
윤후근(尹厚根)
신봉균(申鳳均)
김동승(金東昇)
이동훈(李東勳)
홍동식(洪東植)
김태주(金泰周)
박태호(朴泰鎬)
조영동(趙營東)

마곡사, 나무, 오후
고산사,은진미륵
가을, 해바라기
소녀, 개, 새
복숭아
가을, 절규
앉은 여인
풍경, 나리있는 풍경
맨드라미
복전암 풍경
秋心
얼굴, 정물

정물
여인
투견
등나무, 성당

한밭 여자중학교
충남 중학교
강경 여자중학교
원동 초등학교
조치원 중학교
대전 공업고등학교
대전 중학교
대전 고등학교
도 학무과 장학사
대전 여자 중학교
한밭 중학교
한밭 여자중학교
충남 여자중학교
대전 여자고등학교
대성 중학교
온양 중학교
목포 교육대학교

동양화부

고경자(高京子)
김동순(金東淳)
성낙일(成樂逸)
우민형(禹民亨)
허   훈(許   薰)
김상순(金相淳)
최종태(催鐘泰)
임상묵(林庠默)

풍경
음과 향, 풍속
도옥(陶屋)
동경(冬景), 무속
수선(水仙)
욕망에의 고독
두상
어(漁)


표구사

호수돈 여자중ㆍ고교


대성 고등학교
보문 고등학교

 

위의 도표는 제7회 충남미술협회전에 출품한 25명의 참가자 명단과 작품명 및 그시절 회원들의 당시 근무처이다.

1962년 5월 15일 한국예총 산하 한국미술협회에서 대전미술협회(구 충남미협)를 인준하기가지는 사전에 이곳 대전을 중심으로 '화가들 모임'이 있었고(충남미협 녹청회) 나름대로 미술단체 활동에 따른 전시회가 있었기에 인준이 된 것이라 본다.  주로 이동훈 화실과 현 동양 백화점 뒷골목에 있는 서라벌 다방(전 산강화랑 대표 장정일씨 부친 경영)에서 주로 현직 미술교사들이 역사적인 한국미협 대전지부전 창립을 위한 준비작업이 전개되어 드디어 1962년 5월 16일 대전방송국안에 있었던 '충남공보관 전시실'에서 한국미협인증 제1회 미협전(5.16혁명 제1준ㄴ 기념)이 개막되었다.

제1회 5.16혁명 기념전이라고 일컬었던 이 전시회는 명실공히 대전미협이 한국미술협회에 정식으로 등록이 된 후의 첫 전시회라는 점이 중요하다.  회장은 이동훈, 부회장은 김기숙, 간사 정택은씨였다.  창립전에 출품된 작가로는 다음과 같다.

한국화 : 우민형, 이만구, 권탁원, 이명희, 김동순
서양화 : 이동훈, 김성재, 김철호, 홍동식, 이남규, 조영동, 윤후근, 서진달, 김동승, 신봉균, 이지홍,
            박태호, 조한흥, 황진국, 유우연, 이   영, 송용달, 손중성, 박영홍
조   소 : 최종태
판   화 : 정택은
디자인 : 임상묵, 정태진 외 28명이다.

같은 해에 '미협전'이 대전문화원 화랑에서 열렸는데 22명의 회원들이 작품을 출품하였다.  새로 출품한 회원은 김기숙, 육순양씨였다.

대전고 출신으로 서울대학을 다니던 이종상은 11회 국전에서 한국화부문 '내각수반상'을 수상하였다.(12회 국전에서도 문교부 장관상 수상)

이 시대 고교서클 '죽미회'는 대전공고에 재학중인 정명희, 양창제, 김   룡과 한밭상고에 재학중인 임양수, 이영수가 개최한 '5인전'이 충남공보관에서 열렸다.(1962. 10, 1 ~ 7)

이들은 대전미술 2세들의 막내격에 속하며 위로는 이종수, 유희영, 김인중, 송번수, 이준봉, 김완배, 이성태씨를, 김소자, 최인자, 강성열, 김완식, 차영민, 김송효, 김재성, 김봉경, 최영환, 유병돈, 이효숙, 전옥주는 같은 학년으로, 이영수, 김여성, 최창옥, 이영희, 안수복, 조창레, 정필지, 홍명섭, 유근영, 백승철, 정규천, 유병호 등은 아래후배로 이들은 서후배간에 미술에 대하여 교분을 나누었다.

특히 이들 중에 미국으로 이주한 재미화가 김여성과 경기도 지방으로 이주한 이영수는 잘 어울렸으며 그림에 대한 재치가 뛰어났다고 그 시절 후배미술인 최영근 교수는 회고하였다.

또한 전시회때마다 아낌없는 지도조언을 해주셨던 미술교사로는 이동훈(충남고), 윤후근(대전여중), 홍동식(대전여고), 김철호(대전고교), 이남규(서양화가), 성기인(한밭상고), 서진달(대전여상), 이지홍(충남중), 김석천(미술인)선생을 들 수가 있다.

1963년 대전미협전에 출품한 새로운 회원으로서는 이지휘, 김관회, 이명희, 권탁ㅇ뤈, 이종수씨였으며 5.16혁명 2주년 기념연합전시회(미술, 사진, 시화)가 대전문화원에서 열렸다.

이 시대의 문인들과 미술가, 사진작가들이 한자리에서 한 최초의 전시회라는 점이 괄목할만한 행사였다.

시화전에 출품한 작가는 김대현, 안영진, 이양수, 최원규, 송하섭, 이석호, 박용래, 이재복, 신정식, 유동삼씨였고 미술전에는 김동승, 임봉재, 윤후근, 김성재, 이동훈, 황진국, 이지휘, 조영동, 이종수, 이영, 김철호, 이인여, 권탁원, 우민형씨였고 사진작가로는 전성, 박병준, 박대관, 김경일, 박여일, 김이식, 박병준, 김동철, 김남용, 박향이었다.

1963년 제1회 '재경 충남미술 학우회 미술전'은 주로 서울에서 미술대학을 다니는 동인들로서 대전지역의 미술을 전공하려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미술정보를 알리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서울대, 홍익대, 서라벌예대,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졸업생과 재학생으로 65명 회원들은 다음과 같다.

동양화 : 이영수, 정규성, 정상원, 서기원
서양화 : 권영우, 김인중, 유병창, 이상완, 안소자, 배일상, 하동철, 이설자
응용미술 : 이종수
건축미술 : 최영서, 송정호

※ 명예회원으로는
서울대 : 유희영, 이종상, 김인중, 이종수, 민중직, 김원중
이화여대 : 김순자, 고경자
홍익미대 : 오태학, 이옹휘, 하태진, 이영복

※ 회원으로는
서울미대 : 정상원, 이설자, 홍성표, 하동철, 안소자, 안종문, 이철주, 박종대, 윤여용
이화여대미대 : 문명자, 최휘강, 최미강
서라벌예대미대 : 신형섭
홍익미대 : 권영우, 유병창, 홍승익, 신동주, 배일상, 이상완, 이영수, 송정호, 정규선, 김정열, 김철성,
               남궁흥자, 목계순, 박청자, 서기원, 홍병학, 이선렬, 민덕현, 김계호, 유일기, 조성묵,
               김경화, 최영서, 송번수, 이병선

이 시기에 서울에 입학한 미술대학생으로는 홍익미대 강성렬, 김완식, 정명희, 서라벌예대 미술과 김관호, 임양수, 이종석, 장우의, 전래식, 전옥주 그리고 수도 여사대 미술과에 이효숙이 있었다.

대전 문화원 후원하에 육성된 '미상록' 창립전(1964)은 송진세 선생의 지도로 대전시내에 거주하는 고등학교 미술반원들의 그룹전으로 현재 31년의 세월속에 성장을 해왔으며 회원 중 대전화단에서 활동하는 사람 중에는 김치중('95 대전 미협회장), 최영근('95 대전예총부회장), 백승철(대전판화협회회장), 이현구(호수돈여고 미술교사)씨 등이 그 시대 창립 맴버였다.

1966년 이인영은 제15회 국전에서 (서양화부문) '오후'로 국회의장상을 수상하였다.

충청남도 학무과 미술장학사 김기숙선생은 '63년에 공주교대로, '68년에는 인천교대 교수가 되었다.(문교부 미술편수관 역임)

대성고 미술교사였던 최종태선생은 서울대 교수, 대전공고 미술교사였던 이지휘선생은 대구계명대학교 교수로, 조영동, 이남규선생은 공주교대로, 보문고교 임상묵선생은 충북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청소년 미술활동에 활력소를 제공해준 미상록 창립 지도교사였던 송진세 선생은 1970년 서울 미협으로 옮겼다.

1968년 충남고등학교에서 정년퇴직한 이동훈 선생은, 서울수도여사대 미술과 명예교수로 출강하게 되어 대전미술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에 대전미술협회를 이끌었던 일부 주역들이 타지역의 미술발전을 위해 떠났다.

1969년도 정기총회에서 대전미협 회장에 김철호 선생이 취임하면서 경부, 호남고속도로가 뚫리듯 대전미협의 태동기에서 성장기를 향해 나갔으며 대전 최초의 전국학생미술 실기대회를 개최하여(총무 신봉균) 학생미술교육에 새바람을 넣어주었다.

다가오는 1970년대의 충청남도 주최의 '충청남도 미술전람회' 탄생과 대전 실업초급대학교와 목원대학교 및 한남대학교에 미술과가 신설되는 새로운 전환기의 대전미술을 맞이하게 된다.

대전 미협이 해방전후를 통하여 60년대 말까지 흘러온 세월을 뒤돌아 보면 먹고살기 바쁜 생존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문화예술을 향유하기란 그림의 떡으로 어렵게 생활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지역엔 미술대학도 없었기에 서울로 향해야만 되었던 그 시절 논, 밭 팔아 등록금을 마련했고 혹은 아르바이트나 개인지도를 해야만 했던 그 시대에는 '미술인이 되면 밥굶는다.'라는 홀대와 냉대를 받아가면서도 미술공부를 하였던 선배, 동료, 후배 미술인들에게 뜨거운 위로와 감사를 드리고 싶다.

이 지방미술의 풍토조성에 밑거름이 되었던 장인, 묵객들이 해방전후와 6.25, 5.16등 어려운 시대의 와전 속에서도 묵묵히 대전미협을 육성시켜온 것은 작품의 질이나 수준을 논하기 전에 그 시대를 수놓았던 분들의 에술에 대한 뜨거운 정열의 소산으로 본다.

낮엔 교단에서 후학을 지도하였고 밤엔 창작을 해야만 했던 대전미술 유입 1세대인 고 박성섭, 고 이동훈선생과 김기숙선생은 구준히 대전의 후진양성과 미협을 읶르어 오셨으며 교단에서 정년을 다하신 윤후근, 김철호, 홍동식, 정택은, 신봉균선생과 작고하신 고 박승무(한국화), 고 이응로(한국화), 고 이경배(한국화), 고 조중현(한국화), 고 김화경(한국화), 고 황진국(서양화), 고 김성재(서양화), 고 장욱진(서양화), 고 김동선(서예가), 고 우민형(한국화), 고 김수평(서양화), 고 이창호, 고 윤완호(한국화), 고 김윤기(서양화), 고 강신철(한국화), 고 이종훈(디자인)선생께 이지역 미술발전을 위해 노력한 공을 고맙게 생각한다.

예술과 문화적인 미비한 그 시절을 역경을 못참아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타지역에서 고통을 이겨가며 명성을 얻은 이 고장 출신 미술인들이 90년대 들어 고향에서 주선한 전시회 '우정의 만남전'을 통하여 ['93년도 : 최종태(조각가), 이종수(도예가), '94년도 : 이지휘(서양화), 임봉재(서양화), 조영동(서양화), '95년도 : 김기숙(서양화), 윤후근(서양화), 김관호(서양화), 김철호(서양화), 박태호(서양화), 정택은(판화), 진문섭(서양화), 홍동식(서양화)] 고향에 대한 따뜻한 옛정과 우정을 되살리고 있다.(대전중구문화원 원장 박동규 주선)

재미화가 김여성은 '오원화랑'에서 재불화가 김인중은 '삼성생명전시장'에서 귀향 전시회를 가졌으며 또한 한림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 종상화백의 개인전 '진경의 원형을 향한 구도, 일랑, 이종상의 회향전' ('95. 10. 16 ~ 12. 27)도 같은 맥락의 미술전시회로써 어려웠던 시절객지에서 앞만 보고 치달려야 했던 흘러간 세월을 뒤돌아 보았다.  오늘의 대전은 질적이나 양적으로 팽배해졌교 대전 EXPO 개최를 통하여 시민들의 의식도 높아져 늦은 감은 있지만 박물관이니 미술회관건립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런때일수록 대전 시민들의 몸과 마음이 건전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문화인들의 정서 교육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미술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산소와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전에도 그간 많은 미술단체가 우후죽순처럼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들은 대전미협이라는 큰 나무에서 얻은 결실이니 대전미협을 중심으로 한덩어리가 되어 지방미술이 세계적이 되도록 새로운 앞날을 창조해야 될 것이며 어제와 오늘의 미래의 맥이 아름답게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임양수
1945년 대전출생 / 현, 대전미협 감사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졸업(미술교육전공)
한국미술교육학회 창립부회장 역임
대전미술교육 연구회 회원 / 이신회, 형상전, 에우전 회원

 

 

※ 성장기의 창작과 갈등의 인과(1970년대 대전미술)

대전미술협회의 역사를 정리 추인하고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나 아직 그 현장에서 활동한 작가들이 생존해 있음으로 어느 정도 확실한 정황을 회고할 수 있어 감사한다.대전을 중심으로 한 충청지역의 미술활동은 저후 1953년경에 이미 자생적인 미술인 모임을 결성할 정도로 조직면에서 중앙 미술계보다 앞섰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부터 60년대 까지를 이 지역 미술의 태동기로 본다면 70년대를 성장기로 80년대를 활동기로 보며 90년대를 정착기내지는 대전미술의 성격과 구조가 어느만큼은 확립된 시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이러한 시점과 미술의 해를 맞아 그 역사를 뒤올아보고 오늘의 대전미술과 발전하는 미래의 대전미술을 조망하고 정리하여 볼 때라고 생각된다.필자는 [대전한국화단의 역사와 현황]<기사나 정명희 화집, P.56 오원화랑 1993>에서 앞에서와 같이 구분했다.

대전미술협회는 70년대초 불과 3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소규모 단체이었으며 한국화단의 중앙무대에 인지된 회원과 작가도 적었던 점은 모두가 수긍하는 일이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는 사회와 경제의 발전과 인구의 증가와 함께 회원수만도 그 열배인 300여명의 방대한 미술인 조직단체로 자리잡았다. 물론 양적인 팽창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대전의 미술문화활동은 중위권의 대표적인 위치를 정립하고 있으며 현재는 국제전을 유치하는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대학교육기관도 충남대,목원대,한남대,배재대,산업대,대전실업전문대,중경전문대,대전전문대 등과 천안,공주,이리,전주 등의 이웃지역 교육기관까지를 연계한다면 가히 천문학적 팽창이라 말할 수 있다. 70년대를 대전미술의 성장기로 설정한 것은 71년부터 국전과 같은 성격의 신인 등용문인 충청남도 미술대전이 개최되어 대전을 중심으로 한 미술문화발전의 기틀이 마련되었으며,대전실업 초급대학(70년 신설,생활미술과),목원대와 한남대에 미술교육과 (1973)가 신설되는 것을 계기로 배재대, 충남대 및 전문대학에 속속 미술전문 교육기관이 신설되어 많은 미술인이 양성되고,전문화랑인 산강화랑(관장 장정일 1973),홍명화랑 (관장 신현국 1974),오원화랑(관장 김진원 1974),남계화랑(관장 조종국 1975)등이 잇따라 개관되어 중앙화단과 가교역할뿐만 아니라 척박한 지역정서에 새로운 미술문화 환경을 제공하고,학생들의 교육의 장을 넓히며,미술문화의 저면확대에 크게 기여한 시기이며, '충남청년미술인회' 등 많은 미술단체의 생성과 활발한 미술활동으로 미술협회 중심의 지역미술이 다변화 하는 등 모든 면에서 성장기로써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대전을 비롯한 충남지역의 중등학교 미술교사 중심의 활동에서 중앙화단의 많은 작가들이 대거 대전으로 유입되면서 미술계는 신선한 충격을 받게되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시기의 대전화단의 단체별 활동상황을 몇가지 형태로 구분한다면 첫재, 미술협회를 중심으로 한 활동이고, 둘째는 동문전 형식의 친목단체 그룹이며, 셋재는 신세대 중심의 실험적 집단이 있고, 넷재는 대학교 미술행사인 교수작품전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미술협회전은 일년에 한번씩 개최하는 정기전뿐인데 회원간의 질적 편차로 인하여 상호 유기적 관계가 소원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아마추어요 전문가요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있었고 훗날 이일들로 인해 단합된 힘을 보이지 못한 선배들 이라는 오해를 남길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었다. 때문에 출신학교를 내세워 서울대, 홍익대,예대(중앙대와 서라벌예대를 칭함)동문 그룹들이 서로의 영향력을 키우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후반기 한남대 목원대 등 이 지역 출신 젊은 미술인들에게 좋지 못한 인과관계를 물려준 셈이 됐으나 이 또한 한국화단의 고질적 병폐의 이첩으로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상황이다.

충남청년미술인회의 창립전(1970. 6.14~19 예총화랑)은 시대적 소명답게 신세대에 의해 결성된 그룹으로 '새롭자`는 케치프레이즈를 내세워 출발했다. 이후 두차례의 전시이후 '청미회`로 확대 통합되었고 중반엔 '충남미술가 협회`로 개칭, 조직을 재정비 했다. 이유야 어지되었든 이일로 대전 미술인은 한동안 양분된 상태에 있게 된다.

충남청년미술인회의 6월 창립전에는 정명희,양창제,강성렬,임양수,김여성,이영희,예종국,박관옥,김영제,백승철,김치중,우옥순,이윤구 등 이고 8월전 (제2회전)에는 차영민,이영수,조창례가 영입되었다. 청미회 제2회전(79. 12.15~23 시민다실 ※ 팜프렛자료에 의하면 3회전이라고 함. 현 동양백화점 건너 지하도 입구의 카디날 양복총판 2층)의 출품자는 이인영,임봉재,박충식,김배히,박명규,이명자,정명희,임립,김여성,이영수,김치중이었으며,제3회전('73.12. 26~31 산강화랑)때는 권영우,김완식,신동주,신양섭,오세례,유성숙,류재일,윤정모,이곤순,이성태,이순실,장우의,정성근,황효창,고원필 등이 영입되고 다음해의 4회전을 개칭한 충남미술가 협회전으로 개최하였다. '70년대 대전화단사를 통해 가장 큰 사건을 꼽는다면 전반기의 충청남도 미술전람회 (도전)의 탄생과 후반기의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국전)의 대전순회전시때 도난사건을 들수 있다.

하나는 가장 경사스러운 일이며 또다른 하나는 가장 수치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충청남도 미술전람회('71. 5.11~20 예총화랑 문화원화랑)는 매년 개최되는 과정에서 제도상의 보완점으로 규약이 바뀌어 초대작가제도가 추천작가를 거쳐 되도록 고쳐지기도 하였으며, 대학간의 과다한 경쟁으로 전람회의 목적과 지역미술에 주는 부작용도 많았다.

각 미술대학은 학과 설립의 초창기였기 때문에 학교마다 명예를 걸로 공모전 (충청남도 미술전람회)을 이용했기에 오히려 미술협회 회원들과 이지역 미술인들은 소외되고 의지할 곳 조차 없었다. 충청남도 미술전람회로 인하여 선배와 후배,제자와 스승의 입장이 뒤바뀌는 기이한 현상이나 부작용이 생겼으나 긍정적으로는 대전미술의 발전을 앞당긴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제1회 충청남도 미술전람회에서 대상엔 김철호의 '얼`이,차석에는 강신철의 '심연`이,또 한국화에서 정명희의 '월광`,서양화에서 조영동의 '작품`,서예에서 이곤순의 '한시`가 각각 예총지부장상을 수상했고 특선에 남상학,조창남,차두홍,박세은,이영수,임광,백창현,이명자,이소자,송옥희,강중식,박재홍,유복희,임복채,류창로,김동연,이환무,유은곤,김옥연,이재숙 등이 수상했다.

후반기의 잊지못할 커다란 사건은 국전의 지방순회전(1978. 11. 20 대전여상강당)때 작품을 도난당한 사실이다. 문회의 불모지란 오명을 여지없이 끌어안은 이 사건은 칼로 작품들을 오려내간 절도사건으로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사건이다. 변변한 전시장 하나 마련못한 이 지역으로 써는 염치없는 일이나 그로인해 시민회관의 건설이 앞당겨지는 계기도 되었을 것이다. 산강화랑은 개,폐관을 대전일보가 사설에 거론할 만큼 70년초 대전지역의 열악한 미술 문화 기반을 여실히 증명한 일이다.개관전에는 이 고장 출신의 원로작가를 초대하여 중앙화단과의 연계를 도모했고 지역미술인의 긍지를 높여 주었다. 초대작가로는 이마동,이동훈,박승무,이상범 등이었다. 이듬해 개관기념전에는 김철호,이인영,임봉재,김배히,유재일,정명희,김치중,유성숙,홍승욱 등을 초대하는 등 열정을 보이다 몇 년 후 재정난으로 폐관되었다.

학교동문을 주축으로 하는 그룹전은 63년 중앙공보관(현 연정국악원)전시 이후 10여년 만인 1972년 서울미대 동문전을 필두로 74년 홍익대 동문전과예우회전이 창립되어 매년 정기전을 개최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홍익대 동문전은 권영우,신동주,박명규,정성근,이성태,정명희,정해조 등이,예우회는 신현국,김배히,백종천,이준봉,김관호,임양수,임립,오세열등이 활발했으며 75년에는 그릴회(공주교대동문전)가 창립되어 임영우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76년에 창립한 서양화 르뽀동인은 비구상계열의 권영우,신동주,박명규,박봉춘 등이 주축이되어 활동했다. 후반기에 접어들어 한남대 출신의 유병호,정장직,정길호,이종협,신동국 등 다음 세대들의 19751225그룹이 창립되고 76년 목원대와 한남대 출신들의 목묵회와 청림전과,78세대전 등으로 모여진 세대가 형성되는 바 이재호,허진권,복원규,민동기,윤장렬,박인규,정길호,이종협 등이다. 또한 조각 판화 서예의 김석우,임선빈,홍용선,염호택 등도 이에 속한다.

이로써 이동훈 김기숙,윤후근,홍동식,김철호,신봉균,이인영,임봉재,조평휘,이종수와 신현국,김배히 권영우,신동주,유재일,박명규,이명자,정명희,임양수,김관호,임립,김치중,김석기,유근영,정해조,강지민,박병희,조종국,임재우,이곤순,정태희 등과의 연대를 들 수 있다. 79년 서양화 구상계열의 이신회가 김철호,이인영,임봉재,정영복,김배히,유재일,임립,김정호,김회직,박세은,김치중,박한동을 주죽으로 창립되었다.

같은 해 전국체전이 회갑을 맞는 기년전에 걸맞게 대전시민회관이 준공되고,그 기념전이 명현의 유묵과 향토작가 초대전으로 손수익 지사의 배려로 개최되었다. 추사 김정희의 유묵을 비롯해 서천 출신의 조무,부여의 이린상,천안의 강세황,공주의 이경배,이상범,대전의 박승무,동학사주지였던 조지순,금산의 정해준의 그림과 송시열,김장생,이산해의 글씨를 비롯하여 지역작가로 김철호,이인영,조평휘,임봉재,홍성표,김세원,이완종,이영래,김배히,이원자,이명자,정명희,임립,김치중 등이 참여했다.

마지막으로 70년대를 마감하는 1976년도 미협전(12. 8~12 대전문화원)과 1973년도 미협전 (9. 25~30 산강화랑)의 비교를 위해 출품작가를 분야별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1979년도 미협전 75명 출품

한국화 : 남영자, 박정래, 민중기, 양태의, 이대훈, 이영래, 이완종, 이재호, 이중부, 이창호(작고), 전영기, 정명희, 조평휘, 허진권, 강신철(작고), 권오철, 김세원, 김석기, 김순기(이상 19명)

서양화 : 박명규, 박영득, 박병관, 박한동, 백승철, 백종천, 신동주, 신봉균, 신현국, 오세례, 오세열, 왕봉희, 유근영, 유병호, 유혜경, 임봉재, 임양수, 정영복, 정장직, 조영동, 지형민(치우), 홍동식, 홍명섭, 강현서, 권영우, 김관호, 김배히, 김정수,김철호, 김충경, 김치중(이상39명)

조각 : 박병희, 백현옥, 윤영자, 임선빈, 황교영(작고), 김석우(이상6명)

서예 : 이곤순, 임재우, 정태희, 조종국, 심응섭.(이상5명)

공예 : 이종훈(작고), 남흥태, 유애로, 정해조, 최영근, 강지민(이상6명)

※ 1973년도 미협전 34명 출품

한국화 : 강신철, 김숙자, 이만구, 정명희, 최정일(이상5명)

서양화 : 강현서, 고원필, 권영우, 김배히, 김여성, 김철호, 김충경, 김태주, 박명규,백종천, 손부일, 손중성, 신용길, 심규선, 오세례, 유재일, 윤후근, 이대훈, 이명자,이성태,임립, 임양수, 임봉재, 홍도식, 김관회(이상26명)

조각: 김원중

공예: 이종수

서예: 이곤순

중앙화단과의 괴리감이나 지역 여건의 척박함에도 불구하고 불타는 창작의지와 향토문화발전에 막중한 기여를 아끼지 않은 미협회원이 있었음으로 오늘의 대전미협이 존재한다.  또한 저마다의 성공을 위한 혼신의 노력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당연한 것이며 미래지향적 삶의 태도는 아름다운 것이다.

대전미협은 70년대 불붙은 한국미술계의 사회적 부흥에 힘입어 질적, 양적으로 발전을 하였다.  다만 지역 미술인과의 이기적 인과고리인 불협화음보다 창작활동의 심화로 맺어진 결실들을 차세대에 어떻게 전달하는가 하는 더욱 중요한 일에 결실이 적다는 것에 아쉬움이 남는다.

중앙화단으로 올라가지 않고 향토를 지켜온 회원들과 전국규모의 각종 공모전에서 수상의 영예를 얻고 대전을 빛낸이들의 노고 또한 중요하다 할 것이다.

70년대 어려운 시기에 대전미술협회를 위해 회장으로 봉사한 홍동식, 김철호, 신봉균, 이인영, 임봉재 회원에 감사한다.

※ 앞의 기록들은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팜프렛 자료들을 이용했음.

정명희
현, '95 미술의 해 대전광역시 지회 조직위원장 / 신수회 회장
홍익 미술대 회화과를 다녔음
제1회 안견미술상 / '93 대전직할시 문화상수상 / 개인전 24회

 

 

※ 대전미협 80년 발돋움, 1980년대(80년의 초반상황)

정치, 사회적으로 80년의 봄이 잠깐 시작된 후였다가 계엄이 확대 실시되는 5공화국의 문턱에서 대전미협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그 사실은 당시 문화원에서 있었던 미협회장의 민주적선거였다.

흥미있는 선거의 순간!
선거를 요약하면 신동주 회장은 당시 재적인원 40명중 39명 참석에 21표를 얻어 아래의 사진과 같이 1980년 선거 결과 회장 신동주와 부회장 박명규, 총무임립 정명희 등의 회장단 출현으로 이 시기부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회원가입의 절차와 선거제도, 정관관리, 미협회원들의 권익옹호 및 대전 미협행정을 쇄신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미협본부와의 정기적 공문서 교환, 회원의 게통적 신상 파악 및 문예진흥기금 신청등을 연구하는 최초의 시기였다.  왜냐하면 80년이전에는 회비 5,000원 뿐이며 외부나 정부의 진흥기금 지원 및 신청이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며(이종근회원 증언) 고작 미협1년 예산이 회부충당금 년 20만원으로 추정될 뿐 아니라 회원 40명이 내는 회비만으로 대전미협회원들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미협을 운영해 온것이 검증된다.  회원들의 친목도모는 뒷골목의 막걸리집의 따뜻한 모임이었으며 당시 정식으로 중앙미협의 회원들을 갱신 등록 절차를 밟아 명실공히 공인된 대전미협의 출발을 보았으며, 그 후 예술인의 의료보험의 가입 미술행정의 중앙집중식 운영과 서울ㆍ대전간의 동일한 회원의 참여, 전국미술협회 지부장회의를 돌아가며 개최하는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미술협회 뺏지, 미협회원증, 공문서 교환으로 대전미협의 활성화를 기하는데 신임회장단이 분골쇄신한 것으로 검증된다.

특히 스폰서제도 도입의 배경을 살펴보면 80년 6월 신동주(회장), 권영우회원, 이종근회원 등이 에꼴 드파리전시가 끝날무렵 작품인수 차 서울미협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당시 이종근회원의 친척 광신운수 택시를 무료로 대절하여 중앙미협과 대전미협의 교류와 격차를 해소하고자 알파, 신한회사를 방문, 대전미협 발전을 위한 제언을 했으며 그 결과 대전미협(충남), 한국미술협회 충남지부 스케치단을 결성하여 내장산의 백양사를 거쳐 스케치여행을 하였으며 대전미술인들의 미술활동을 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이종근회원이 증언하였다.  당시 총무 정명희의 대흥동 로타리 2층 화실이 미협사무실 이었으며 별도로 정명희회원은 굶기클럽을 조직하여 미협운영의 하부조직을 도운 것으로 확인된다.  그 해 이후부터 중앙미협과 연락이 긴밀해지고 지금도 행해지는 문예진흥기금지원의 원류는 15년전의 활동으로 년간 지원받는 도움의 뿌리라고 볼 수 있다.  83년부터 문화예술인의 개인자격으로 의료보험가입이 시작되었으며 미협본부와의 매년 회장단 결속도 더욱 긴밀해져 중앙전시 및 회원동향이 미술연감에 등록되었으며 국제전의 지방배분도 연구되었다.(신동주 증언)  특히 미협전은 봄가을로 최초로 분과별 전시를 시도하였으며 서양화(신동주), 동양화(정명희), 공예(최영근), 서예(임재우), 조소(홍명섭)를 중심으로 대대적 미협분과전을 통하여 미협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다.  이 시기의 미협공로자는 회장이였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후 신동주회장은 일신상의 건강이유로 미협발전을 위해 사퇴하고 새로운 회장단 김철호회장 이하 금성당 4층 사무실 시절의 정명희, 김치중(총무)등은 금성당 4층을 중심으로 미래의 대전미협을 위한 출발을 시도하였다.

그 후 금성당 4층은 3개실로 나뉘어 1실은 정명희화실, 2실은 김치중화실, 3실은 미술협회화랑으로 최초 개관을 하여 명실공히 한국미술협회회원 자격규정에 따라 자격심의도 하고 직인도 만들고 공식적으로 미협화랑에서 전시를 통한 회원간에서 전시를 통한 회원간에 교류를 제공하였다.  이와같이 80년초는 미협의 뿌리를 내리는 데 공헌한 시기라고 본다.

정장직
한국미술협회 대전광역시 지회 사무장 역임
한국미술협회 대전광역시 지회 이사 / 대전실업전문대학 산업체 겸임 교수

 


 

※ 80년대 대전미협의 몇가지 상황

먼저 금년은 정부가 미술인에게 특별히 베푼 미술의 해로서 대전 미술 50년사를 발행하는 작업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협 집행부에서 편집위원을 구성하여 나에게 1980년부터 현재까지의 대전 미술의 이모저모를 쓰라는 원고청탁을 했지만 자세한 것은 저보다 선배 선생님들께서 역사적 자료와 증언이 있으리라고 믿고 필자는 1969년 한국미협 충남지부(현 대전미협)에 입회했기에 그 시절부터 현재까지 내가 참여한 많은 작품전과 행사를 치르면서 잊지 못할 일들을 보고 느낀대로, 마치 흘러간 대중가요 부르듯 두서없이 언급하겠다.

첫째, 1973년 내가 충남미협(현 대전미협) 사무장(총무)으로 일할 때의 미협회원수는 현재의 10분의 1인 30여명이었고, 예산은 관에서 보조해 주는 것도 없고 아주 빈곤한 실정으로 협회라기 보다는 아기자기한 동인회처럼 낭만이 넘치는 순수한 모임으로 주로 교직에 몸담은 회원이 많고 그외는 돈벌이를 전혀 못하는 회원들로 어두워가는 밤이면 자주 만나 대포잔을 기울이며 그림과 미협에 대한 대화속에 통금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주머니 사정이 빈곤한 회원들은 총무의 눈치만 보곤 했다.  이 때 잘 모이던 술집은 오복식당(현 동양백화점)이다.  둥근 드럼통의 연탄불에 넙적한 철판위에는 두부, 콩나물, 오징어, 정도의  안주였다.  외상거래를 할 때는 목동 4가 우일식당(현 KBS입구)을 자주 애용하였다.

팜플렛은 지금과 같은 고급스런 칼라도판이 아닌 프린트 형식으로 초라했으며 전시장은 고작문화원화랑(현 동양백화점)과 예총화랑 뿐인데 화랑 바닥은 시멘트가 아닌 흙바닥이었고, 시민들의 호응도는 무관심했으며 관람객 역시 매우 드물었다.

두번째, 1975년에 창립된 대전지역의 비구상 그룹으로는 제일 먼저 조직된 르뽀(Reportage) 동인회를 들 수 있다.

이 때 창립회원(권영우, 신동주, 박명규, 박봉춘, 유근영) 5명은 홍익대 동문으로 여러차례 만나 이 지역의 현대미술 발전을 위해 궁리와 협의끝에 어려운 그 당시 창립전을 대전문화원 4층(현 동양백화점) 화랑에서 개최했지만 애써 발표한 전시를 모 신문 기사에서는 그리 좋은 평으로 다루지 않았다.  관람객의 모습은 출입문으로 고개를 빼쭉 돌릴 정도로 민도와의 호응도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다.

이에 격분한 회원들은 옆방에 있는 피아노도 두들겨보고 관람객이 없을 때는 소리도 쳐보다가 그래도 감정이 풀리지 않으면 옆에 있는 미술인들의 아지트 오복식당에 자주 들러 대포잔에 기분을 달래며 서로의 마음을 위로하곤 했다.  그러저러한 어려운 여건에서도 회원 정기전을 지속적으로 개최했으며, 특히 1985. 9. 15 ~ 21 르뽀 동인회 창립 10주년 기념전은 대전시민회관에서 호남지방의 유일한 현대 미술 그룹인 광주(Epoque)와 대전(Reportage)의 합동전을 개최한것으로 많은 갈채와 높은 호응을 받기도 했다.

1987. 10. 11 ~ 16 문화원에서 '87 충남 오늘의 만남전(참가작가 97명), 1988. 8. 9 ~ 14 시민회관에서 충남 어제와 오늘전 (참가작가 125명), 1989. 8. 1 ~ 6 시민회관, 문화원 전관에서 제5회 남부현대미술제(참가작가 210명) 등의 방대한 전시와 행사는 대전미술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그러나 1990년 창립 15주년 기념 100호전을 MBC 문화공간에서 개최함을 마지막으로 삼사십대의 내 젊음에 정열과 욕망으로 가꾸었던 르뽀 동인회는 회원들의 불협화음으로 아쉽게도 해체되고 말았다.

세째로, 1988년 본인이 미협 충남 지부장으로 피선되어 봉사와 희생정신으로 대전, 충남지역의 미술발전을 위해 소신껏 일하고자 했지만 지부장의 자리가 큰 벼슬이나 되는 듯 회원들은 부정적으로 집행부에 대한 불만과 항의로 말도 많고 일도 많았다.  특히 공주, 천안, 서산지부에서 엄연히 협회 직인이 대전에 보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인생략" 이라는 공문을 발송하는 등 공주대학 모 교수를 지부장으로 선임했다면서 상식없는 처사로 언론계에도 파문이 많았고 지상에도 여러번 보도된 바 있다.

이 때 한국미협 본부로 공식적으로 상황을 보고 했던 바, 그럴수가 없다는 답변이었고 그 시기만해도 미술 행정이 엉망이어서 심지어는 충남미협의 회원을 서울 한국미협과 대조확인 작업을 한 결과 많은 숫자의 회원이 등재가 안된 실정이었다.

1989년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됨에 본은은 다시 대전직할시의 초대 지부장으로 재임하면서 겪은 애로점, 지양점을 몇가지 이야기할까 한다.

우선 예술인들은 순수한 감정만 앞서고 행정을 이해 못하기 때문에 삼삼오오 술좌석에 앉으면 상대방에 대한 덕담은 커녕 비난과 부정적인 자세로 마구 말하기가 일쑤다.  그 시절만 해도 문화예술(10개 단체) 조직의 책임자는 급여도 판공비도 없이 자기 호주머니만 축냈다.  시간적, 정신적으로 민주적인 선거와 투표로 선출했다면 회원들은 소속의 장을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협조와 갈채로 그 조직이 발전할 수 있도록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 도리인 줄 안다.

미협은 누구 개인의 것이 아니고 공동체이며 지부장이나 집행부도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임기중에 협회의 발전과 회원의 화합을 위해 겸허한 마음과 봉사의 정신으로 책임을 다한다면 문화예술은 꽃이 필 것이다.

먼저 금년은 정부가 미술인에게 특별히 베푼 미술의 해로서 대전 미술 50년사를 발행하는 작업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협 집행부에서 편집위원을 구성하여 나에게 1980년부터 현재까지의 대전 미술의 이모저모를 쓰라는 원고청탁을 했지만 자세한 것은 저보다 선배 선생님들께서 역사적 자료와 증언이 있으리라고 믿고 필자는 1969년 한국미협 충남지부(현 대전미협)에 입회했기에 그 시절부터 현재까지 내가 참여한 많은 작품전과 행사를 치르면서 잊지 못할 일들을 보고 느낀대로, 마치 흘러간 대중가요 부르듯 두서없이 언급하겠다.

첫째, 1973년 내가 충남미협(현 대전미협) 사무장(총무)으로 일할 때의 미협회원수는 현재의 10분의 1인 30여명이었고, 예산은 관에서 보조해 주는 것도 없고 아주 빈곤한 실정으로 협회라기 보다는 아기자기한 동인회처럼 낭만이 넘치는 순수한 모임으로 주로 교직에 몸담은 회원이 많고 그외는 돈벌이를 전혀 못하는 회원들로 어두워가는 밤이면 자주 만나 대포잔을 기울이며 그림과 미협에 대한 대화속에 통금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주머니 사정이 빈곤한 회원들은 총무의 눈치만 보곤 했다.  이 때 잘 모이던 술집은 오복식당(현 동양백화점)이다.  둥근 드럼통의 연탄불에 넙적한 철판위에는 두부, 콩나물, 오징어, 정도의  안주였다.  외상거래를 할 때는 목동 4가 우일식당(현 KBS입구)을 자주 애용하였다.

팜플렛은 지금과 같은 고급스런 칼라도판이 아닌 프린트 형식으로 초라했으며 전시장은 고작문화원화랑(현 동양백화점)과 예총화랑 뿐인데 화랑 바닥은 시멘트가 아닌 흙바닥이었고, 시민들의 호응도는 무관심했으며 관람객 역시 매우 드물었다.

두번째, 1975년에 창립된 대전지역의 비구상 그룹으로는 제일 먼저 조직된 르뽀(Reportage) 동인회를 들 수 있다.

이 때 창립회원(권영우, 신동주, 박명규, 박봉춘, 유근영) 5명은 홍익대 동문으로 여러차례 만나 이 지역의 현대미술 발전을 위해 궁리와 협의끝에 어려운 그 당시 창립전을 대전문화원 4층(현 동양백화점) 화랑에서 개최했지만 애써 발표한 전시를 모 신문 기사에서는 그리 좋은 평으로 다루지 않았다.  관람객의 모습은 출입문으로 고개를 빼쭉 돌릴 정도로 민도와의 호응도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다.

이에 격분한 회원들은 옆방에 있는 피아노도 두들겨보고 관람객이 없을 때는 소리도 쳐보다가 그래도 감정이 풀리지 않으면 옆에 있는 미술인들의 아지트 오복식당에 자주 들러 대포잔에 기분을 달래며 서로의 마음을 위로하곤 했다.  그러저러한 어려운 여건에서도 회원 정기전을 지속적으로 개최했으며, 특히 1985. 9. 15 ~ 21 르뽀 동인회 창립 10주년 기념전은 대전시민회관에서 호남지방의 유일한 현대 미술 그룹인 광주(Epoque)와 대전(Reportage)의 합동전을 개최한것으로 많은 갈채와 높은 호응을 받기도 했다.

1987. 10. 11 ~ 16 문화원에서 '87 충남 오늘의 만남전(참가작가 97명), 1988. 8. 9 ~ 14 시민회관에서 충남 어제와 오늘전 (참가작가 125명), 1989. 8. 1 ~ 6 시민회관, 문화원 전관에서 제5회 남부현대미술제(참가작가 210명) 등의 방대한 전시와 행사는 대전미술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그러나 1990년 창립 15주년 기념 100호전을 MBC 문화공간에서 개최함을 마지막으로 삼사십대의 내 젊음에 정열과 욕망으로 가꾸었던 르뽀 동인회는 회원들의 불협화음으로 아쉽게도 해체되고 말았다.

세째로, 1988년 본인이 미협 충남 지부장으로 피선되어 봉사와 희생정신으로 대전, 충남지역의 미술발전을 위해 소신껏 일하고자 했지만 지부장의 자리가 큰 벼슬이나 되는 듯 회원들은 부정적으로 집행부에 대한 불만과 항의로 말도 많고 일도 많았다.  특히 공주, 천안, 서산지부에서 엄연히 협회 직인이 대전에 보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인생략" 이라는 공문을 발송하는 등 공주대학 모 교수를 지부장으로 선임했다면서 상식없는 처사로 언론계에도 파문이 많았고 지상에도 여러번 보도된 바 있다.

이 때 한국미협 본부로 공식적으로 상황을 보고 했던 바, 그럴수가 없다는 답변이었고 그 시기만해도 미술 행정이 엉망이어서 심지어는 충남미협의 회원을 서울 한국미협과 대조확인 작업을 한 결과 많은 숫자의 회원이 등재가 안된 실정이었다.

1989년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됨에 본은은 다시 대전직할시의 초대 지부장으로 재임하면서 겪은 애로점, 지양점을 몇가지 이야기할까 한다.

우선 예술인들은 순수한 감정만 앞서고 행정을 이해 못하기 때문에 삼삼오오 술좌석에 앉으면 상대방에 대한 덕담은 커녕 비난과 부정적인 자세로 마구 말하기가 일쑤다.  그 시절만 해도 문화예술(10개 단체) 조직의 책임자는 급여도 판공비도 없이 자기 호주머니만 축냈다.  시간적, 정신적으로 민주적인 선거와 투표로 선출했다면 회원들은 소속의 장을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협조와 갈채로 그 조직이 발전할 수 있도록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 도리인 줄 안다.

미협은 누구 개인의 것이 아니고 공동체이며 지부장이나 집행부도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임기중에 협회의 발전과 회원의 화합을 위해 겸허한 마음과 봉사의 정신으로 책임을 다한다면 문화예술은 꽃이 필 것이다.

 

박명규
한국미술협회 대전직할시 초대회장 역임 / 르뽀창립회장 역임

 


 

※ 충남작가 초대전 본지 - 주관 첫번째 지방작가 초대전
 
    → 충남 미술문화의 검증과 반성을 위한 좋은 계기로 받아들여져

미술세계와 경인미술관이 중앙화단 중심의 폐쇄적 지방 미술풍토를 개선하고 지방화단의 활성화를 위해 기획한 첫번째 지방작가초대전인 '충남작가초대전'이 지난 3월 7일 이금홍 본지발행인과 이경수 미협상임이사 그리고 충남미술관계인사 등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인미술관 전관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이번 전시회에는 충청남도의 서양화, 한국화, 조각, 공예, 서예등 각 부분의 17개 미술그룹에서 선정된 작가 1백 50명이 참가했는데 이같은 대규모의 작가들이 한데모여 서울에서 전시회를 갖기는 충남화단사상 처음의 일이다.

출품한 그룹을 살펴보면 한국화부문에 목묵회, 청림회, 충남한국화협회, 한길한국화회, 서양화그룹은 르뽀동인, 벽ㆍ바닥 그리고 인식, 대전실험작가회.  1975. 12. 25, 창형전, 충남구성작가회, 충남수채화협회, 충남판화협회, 한길서양화회, 형상저이며 조각부문에 목원조각회와 공예의 충남디자인협회, 서에의 충남서단 등 17개 단체이다.

이번 전시회는 충남미술의 현재를 재검증하고 충남미술문화를 널리 알리는 좋은 계기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도내화단에서는 이 전시를 기점으로 앞으로도 5년에 한번 정도 정기적으로 모든 충남미술인이 참가하는 전시회를 가질것을 구상하고 있다.

미술세계와 경인미술관은 지방미술문화 활성화를 위한 노력으로 '지방작가 초대기획전'을 각시도로 확산시켜 전국을 수용할 예정이다.

 


 

※ 금강 현대 미술제 개최에 관하여

금강현대미술제는 수년전부터 연구되어 왔는데 금년 1980년에 창립전을 갖게 되었다.  고유한 성격과 방법론을 강구하면서 해마다 개최할 이 미술제는 현대미술에 자기전력을 투구하여 활동사유하는 작가들에게 신선하고 맑은 의식을 던져주며 현대미술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될 일로 믿는다.  널리 알려진 대로 국토의 중부에 아름답게 흐르는 금강은 그 경관이 비단을 깐듯 아름답고 수질이 ㅁ락은데서 그 이름이 지어졌다하며 온화한 옛 문화의 젖줄이었던 역사의 두께와 함께 순수 소박한 금강 주변의 인성을 말해 주는듯 맑은 빛을 띄우고 유유히 흐르고 있다.  미술제의 명칭에 이 이름을 붙힌 것은 금강이 말해주는 순수성대로 참신한 각도에서의 일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 미술제는 오래전부터 금강권의 현대미수인들의 바램으로 부터 연유되었지만 반드시 지도상 의미의 지역적인 참가 범위를 갖는다는 식의 미술제는 결코 아니며 그런 의미로 붙히운 이름도 아니다.  금강이라는 자연 명칭이 던져주는 아름답고 우아함, 순수 소박함, 깨끗하고 맑음처럼 귀하고 고양된 의식을 찾으며 학구적 자세로 심혈을 기울여 연구하는 작가들의 정신의 심벌로서 잭해져, 그에 합당한 일들을 하기 위하여 붙힌 이름이다.  이름지어 부르니 그 말과 뜻이 좋았음인지 이 미술제를 의논했던 주변에서 열광적인 환영과 성원이 있었으며 4~5개의 미술제방법론을 놓고 여러사람이 고심하던 끝에 금강 그 자연의 현장에서 그 주변의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한다는 방안으로 기획 되었다.  즉 첫 창립저을 맑디 맑은 강물이 흐르고 고운 모래가 깔려있는 공주 금강에서 약 30여명의 금강권의 현대작가들이 야외작품의 발표를 통하여 행하기로 하였다.  작가선정은 1980년 현재 금강권과 연고(출생, 성장, 직장 거주)를 갖고 있는 이들 중에 추상미술 이후의 현대미술에 적극활동하여 야외작품의 발전경험 혹은 발표능력자로 정하였다.

기획, 진행, 작가선정 등은 미술제 운영 위원회에서 위임한 홍명섭, 박동식 2인에 의하여 이루어 졌고 금번 야외전을 통한 창립전 이후 2회전은 81년초(3월이내) 대전에서 홍명섭 1인의 기획진행으로 개최할 예정이다.

금번 창립전인 금강사장에서의 야외전은 자연의 순성과 이 시대를 사는 20, 30대의 젊은 작가들의 명철한 지혜가 접합되는 뜻깊은 장이 될 줄 믿는다.

 

1980. 11

금    강    현    대    미    술    제

금강현대미술제 창립 야외작품전

중추가절에 귀댁의 평안하심을 양망하나이다.
금반 금강현대미술제 창립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참관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작가명단 : 고승현, 고창환, 강성렬, 강희순, 곽남신, 김관호, 김영호, 김용익, 박인규, 백준기, 신경문, 신동국, 송일영, 안치인, 심회종, 오자영, 유근영, 유동조, 유병호, 이종협, 이정훈, 이윤구, 이은철, 임동식, 장금자, 정장직, 정길호, 정광호, 조성모, 지석철, 허진권, 홍명섭

기간 : 1980. 11. 16(일) ~ 22(토)

장소 : 공주 금강백사장

※ 발표작품 수록 작품집은 80. 12월 중순 발간 배부됩니다.


 

※ 충남의 공예ㆍ디자인 - 제1회 충청남도 산업미술대전을 맞이하여

현재 우리사회에서 "用"보다 "美"를 우선으로 하여 창작하는 사람들을 "공예가"라고 부르며 그 반대로 "用"을 먼저 생각하고, 제품을 창작하는 사람들을 "디자이너", "산업미술가", "산업공예가"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인간이 무엇을 만드는데는 재료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재료에 따라서 처음에는 제일 다루기 쉬운 나무, 뼈등을 가지고 생활도구를 만들었을 것이며, 그 다음단계로 돌, 흙, 금속 그리고 현재의 인공재료로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가장 오래된 생활도구는 구석기시대의 타제석기(打製石器)가 있으며 나무종류의 생활도구는 썩어서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어서 유물이 발굴되지 않고 있다.  신석기시대의 마제석기(磨製石器), 토기, 청동기, 철기, 도자기, 목공예품등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가 흔히 디자인하면 유럽이나 미국 일본에서 들어온 것으로 생각되어별 거리감을 느낄런지 모르나 공예가가 공예품 자체에 공헌하여 승화시키는 순수 공예도 중요하겠지만 우리 인간들의 삶에 어떻게 아름답고 풍요롭게 공헌하며, 또한 생활과 직접 밀착되어지게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해방후 대학에서 공예ㆍ디자인교육이 시작되었으며 충청남도에서는 뒤늦게 1971년 "생활미술과"라는 명칭으로 처음 시작하여 "산업미술과", "응용미술과", "산업디자인과", "공업디자인과" 그리고 "미술교육과"와 "미술과"에서 공예ㆍ디자인을 전공 혹은 부전공으로 배운 학생들이 4년제 대학과 전문대학에서 많이 배출되어 사회로 진출되고 있다.

충남은 디자인에 대하여 기업 인식의 부족으로 일부의 수출회사들은 아직도 외국의 디자인을 그대로 모방하여 만들어 수출하는 단계이므로 제품을 창작하여 새로운 디자인품목을 수출하는 실정에 미치지 못하여 아직 디자인 개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면도 있다.

충남관광민예품을 지도하면서 도자기 공장을 보고 느낀것은 잠깐 이야기 해보면 도자기 하면 "china, 라고 할 정도로 중국은 도자기의 본산지였으므로 앞으로 더욱 중국이 개방되어 풍부한 재료를 가지고 싼 값으로 도자기를 만들어 낼 경우 우리나라 도자기 산업에는 큰 영향이 있다.  타 분야도 마찬가지 하겠으나 이제는 충청남도 도자기 산업도 모방의 단계를 하루속히 벗어나 디자인개발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생각된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기업체는 디자인 담당부서를 설치하지 못하고 있는 곳이 많고 설치된 디자인 부서의 명칭도 통일되지 않아 디자인의 본원을 왜곡시키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또 편제상의 위치도 낮기 때문에 디자이너들의 역활과 기술을 효과적으로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활동 영역도 극히 제한 되어있다.

우리나라의 공예ㆍ디자인 계열의 학과가 같은 편제 및 같은 교과 과정에도 불구하고 각 대학마다 학과명이 어떤 통일성을 찾지 못한 형편도 이런 여파라고 볼 수 있다.

디자인 교육은 디자인 발전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요소라고 볼 수 있으며 디자인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서 우리산업의 장래가 달라지며 디자인의 장래 역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대 산업사회 환경속에서 인간생활의 새로운 가치관의 확립과 인간생활의 질적향상을 통해 그 시대가 문화를 창조한다는 의미에서 또한 중요한다.  이러한 중책을 받아 감당할 자체내의 자질 향상을 위해 활동범위의 확대와 적극성이 충남지역 사회에서는 시급히 요구 된다고 생각되어지는 바이다.

충남 공예관계 공무전은 충청남도 미술대전과 충남관광민예품전이 있으나 디자인 관계 공모전이 없었다.

금년 9월중에 한국예총충남지회 주최를 충남도민의 산업디자인에 대한 이해와 산업체와 학교간의 디자인에 대한 정보교육 및 유대강화, 개발의욕의 고취와 생산제품의 고급화로 수출증대에 기여한다는 취지로 제1회 충청남도 산업미술대전이 개최될 예정이다.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이 1986년 21회를 개최했으며, 부산산업디자인전은 6회를 실시한 것과 비교한다면 충남은 늦은 감은 있으나 내실있는 알찬 공모전으로 올 9월중에 실시하게 되어 공예ㆍ디자인 계통에 종사하는 사람들 한테는 발전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또한 이 기회에 낙후된 충청남도 공예ㆍ디자인계가 발전되길 바라며 이와같은 큰 행사가 잘 이루어지려면 충남에총지부 한테만 미룰것이 아니라 충남행정기관, 도내기업체, 대학이 협조하여야 된다고 생각된다.  산업공예나 디자인은 기술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협동이란 말이 여기에 해당하는 적절한 표현이 도리 것 같다.  금년 9월에 실시되는 제1회 충청남도 산업미술대전에 충남 공예ㆍ디자인 계통을 전공하는 한 사람으로 이와같은 행사를 개최하는 데 힘쓰신 한국예총 충남지회에 후원해 주신 충청남도, 대전상공회의소, 대전일보사, KBS, MBC, 연합통신에 감사드리며 끝으로 이번 제1회 충청남도 산업미술대전이 잡음없이 개최되기를 기원해 본다.

 

강지민
대전실업전문대학 교수
※ 충남예술에 기고한 글을 옮겼다.

 

 

 

※ 다양성의 시대로 열린 대전미술계
    - 대내외적 역량의 확장과 발전의 전환기 맞은 90년대 상반기

대전미술계는 한국전쟁이후 대전을 중심으로 거주하기 시작했던 몇몇 미술인들의 자생적인 그리고 다분히 미술인내의 단합과 활동을 서로 격려, 고무하는 사적모임 구성체에서 출발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지역에 현대적인 미술이란 개념의 근원을 낳게 한 이들의 활동은 주로 학교교육의 틀 내에서 근거한 것으로 해방이전의 미약한 민족적 미술교육에서 탈피, 비로소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 미술교육과 조직을 꾸려내는 그야말로 모든 출발을 새롭게 하는 근본적 의미의 미술활동을 태동케 하던 시기였다. 그런 만큼 대전지역에 선각자적인 미술인의 개인적 활약은 여러모로 대전미술의 성격과 추후의 방향을 결정짓도록 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줄 수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세대들은 그들의 초창기의 노력과 개인적 면모에서 많은 부분 현재 대전미술계의 특징과 현실을 유추할 수 있게된다. 이때 초창기 미술인구들의 활동이란 토착적인 대전미술의 토대를 이루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그들의 작품세계가 일제시대 미술의 내용과 한계에서 크게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에서 기인한다. 대개 전후 모더니즘적 형식의 틀 속에서 자리잡았던 1세대 미술인들의 작품세계는 대전미술이 구상회화적 전통이 강한 지역으로서의 성격을 갖도록 하는 모태로서 대전미술(이는 반드시 대전만의 특징이라기 보다는 당시 우리 나라 전체 미술계가 지녔던 보편적 상황이라 볼 수 있다)의 특징을 규정하는데 큰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들 초기 미술인들의 상황이란 전반적으로 지역사회의 열악한 조건에 의해 뿌리를 내리고 창작활동에만 전념하기란 힘들었으므로 이들이 마련한 대전미술의 전통은 1세대들의 학교교육기관에서 배출해낸(본격적 미술교육을 위한 체계적 수업을 통해 양산했다는 측면에서) 미술인들로 이어진다.

대체로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에 미술대학을 통해 전문적 미술교육을 습득한 대전미술인들은 우선 전 세대에 비해 여러 모로 다른 특징들을 보여주는데 가장 두드러진것은 이들의 약정증가에 따른 조직적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이미 60년대 초 미협의 맹아적 형태를 통해 이전 세대가 조직적 활동을 해왔으나 보다 많은 수의 미술인구의 확산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다양한 조류를 형성해낼 수 있는 조건을 점차로 마련해 나갔던 것이다. 이렇게 지역에서 배출해댄 세대들은 외지 특히 서울지역에서 교육받고 돌아온 다수의 이 지역 출신들과 합류, 화단의 새로운 영역을 조성하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점차로 나름대로의 일정한 조류와 유파를 형성시킴으로써 미술계의 분화와 발전을 꾀했던 당시 우리 나라의 자체적 흐름에 자극 받았기에 대전미술계 또한 활발한 면모를 날로 새롭게 보여주었던 시기이다. 따라서 현대미술의 추상계열에 대한 이해와 작품화가 늘어가던 때였기에 젊은 세대에 의한 현대적 조형언어의 실험과 적용은 대전화단에 활력소가 되고 있었다, 토착화된 현대미술의 수용은 70년대 말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후 80년대의 세대에 의한 다양한 그룹전으로 장르적 세분화와 관심이 일정하게 통일된 성과로 이어지는데, 이 조짐은 이미 70년대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케 한다. 그러나 70년대 말엽부터 드러난 다양한 대체전의 양상은 대개 동문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에 대전미술계에 새로운 유파와 주요한 성격화를 만들어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에는 부족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80년대에 들어 대전미술계는 미술인들의 양적 확산과 질적 잠품력의 향상으로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활동력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미 백여명을 선회하는 미협가입 회원들은 보다 전문화, 세분화 되어가는 교육기반하에서 점차적으로 그 분야와 활동영역을 다변화해 나가는데 회화 즉 평면작업 일색이던 기류에서 벗어나 디자인, 판화, 공예, 설치, 퍼포먼스 등의 영역으로 확대 발전해 나갔다. 그 예로 87년도에는 판화분과가 신설되기에 이르며 94년도에는 서예분과가 분리되어 독자적인 전시회가 개최되기에 이르고 더 나아가서는 국제분과가 평론분과의 역할을 대행하는 가운데 새로 만들어졌다. 그 외에도 디자인분야나 공예부분도 미협의 보다 효율적인 운영과 작가들의 활동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별로 분과로 설립되는 것이 올바르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 미술대전 등 중앙화단에서의 수상자의 증가가 일러주듯 지역미술이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로 질적으로 발전한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데 이제 서서히 그 역량이 바깥으로 분출되고 있는 작가들의 활동을 미협이 보다 조직적으로 뒷받침해 줄 필요성이 증가되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80년대 후반기에 30대가 주축이 되어 개최했던 젊은 미술인들의 대전트리엔날레전은 이 지역 미술역량이 조직적이고 자유적으로 국제적 행사를 유치해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지역미술의 질적 수준을 더욱 확장해내고 대외적으로 검증받도록 일정정도 기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이후에 지역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지역 미술인들의 노력이 금강을 중심으로 한 '91고드래 국제야외미술제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아직도 90년대 하반기를 남겨두고 있는 지금, 우리주의현재시점인 90년대 상반기는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90년대에 넘어와 변화의 가장 두드러진 점을 든다면 우리사회의 점진적인 민주주의의 발전에 따른 지역분권화속에서 지역민의 구체적 욕구와 맞물린 다변화된 사회적 분위기라 할 것이다. 마치 정치적 격변기는 80년대에 모두 종식된 듯한 상황은 탈정치주의시대를 열었고 후기산업사회의 현상은 문화의 시대로 바뀌어가는 양상을 가져왔다. 이때 지역미술의 현황은 탈모던의 상승기에 일면 편승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지역성이란 과제에 고민하며 향토성찾기에 작품의 생명성을 거는 층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이 바로 대전지역이 가지고 있는 개별적이면서도 독특한 미술계의 일정한 변화여야만 한다면 먼저 지적해야 할 부분은 새로운 발전적 현상을 형성시켜내고 있는 내적 요인 즉 대전미술계의 발전원동력이 어디로 보다 나오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 미협사적 측면에서 살펴 볼 때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90년대에 들어 대전미협의 형식적, 내용적 틀의 변모라 할 것이다. 89년도에 이 지역의 미협은 충청남도와 대전시가 분리된 바 있다. 이는 단지 살림살이의 분가가 아닌 미협이 대전이라는 지역적 토대에 더욱 충실해진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런 구체화된 지역성의 분화는 95년도에 들어 광역시지회로 확대되고 있다. 물론 단순히 물량적 확대가 아닌 대전미협의 역할과 기능의 확대요구로 보아야 함은 당연한 것으로 대내외적 역량의 발전계기로 적극 활동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대전미협이 기존처럼 회원을 위한 친목과 권익보호 차원의 수동적 조직운영에서 벗어나야 할 시기임을 깨달아야 한다. 33년간의 미협은 성년의 나이가 말해주듯 성숙한 면모로 우일신할 때인 것이다. 또한 90년대의 미협은 단순히 구호적 차원에서의 체계화가 아닌 국제적 미술시장과의 적극적인 교류와 지평의 확대를 요구받는 시기라 보아야 한다. 지금껏 중앙화단이라 일컬어지는 수도권지역의 미술계 동향에 민감해하던 협소함에서 탈피, 지역성이란 의미망의 확장을 실제로 목전에 두고있는 지금 세계미술 안에서의 자기정체성 찾기라는 시대적 교육에 합리적으로 다가가려면 지역미술인들의 인식과 작업성과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그 점에서 93년 엑스포라는 계기와 95년 금강에서 가졌던 국제자연미술제는 시사적이다.

이렇게 대외적인 큰 전시가 외향적 성과물을 다수 성취했던 90년대 상반기의 활동은 비단 단체와 대전미협 조직 전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 어느 시기보다 뚜렷한 변별성과 개성을 존중하는 개인적 작업의 결과도 왕성해졌던 때였기에 우리는 뛰어난 작가주의적 면모를 앞세우는 다수의 대전미술인들을 볼 수 있게되었다. 물론 작품적 성향을 같이하는 다수의 다양한 그룹들이 우수한 기획력으로 지역미술의 정체성을 위해 열었던 많은 단체전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같은 양적인 전시회의 증가는 개인과 젊은 작가들이 단체전을 통해 다양한 목소리내기를 드러내는데 더할 나위없는 좋은 방법이기는 하나 전체 대전미술계안에서 흡수, 축적되기 위해선 아직도 미흡한 부분이 많다. 개별화되고 분산된 이 같은 노력들이 소모적이 아닌 발전된 결과로 일정하게 모아져야만 하는 과제가 남아있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문제해결방법은 90년대 후반기 미협이 갖게될 책임 몫으로 남는다.

 


 

1. 조직의 발전과 확장기

90년대 대전미협의 조직적 변화를 기술하자면 먼저 해야 할 것이 이미 89년도에 실시된 바 있는 한국미술협회 대전직할시 지부로 변경된 사항일 것이다. 89년 1월 1일부로 대전시가 대전직할시로 행정적 차원에서 승격됨은 모든 예총산하의 기구도 편제됨을 의미하는데 우리지역 미협도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충청남도 지부에서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대전직할시 지부로 개명됨으로서 본격적인 지방화시대로의 변화에 부응, 보다 확장된 역할을 요구받기에 이른다. 그 동안 하나의 조직이 전체 도와 중심시의 모든 활동을 관장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며 점차 다양한 조직적 분화와 확대를 모두 책임지기에도 운영상의 난점이 있어왔었을 것이다. 대전은 중부도시의 핵심으로서 끊임없이 그 권역을 넓혀왔던 만큼 시에서 직할시로의 변모는 행정편의주의가 아닌 보다 합목적적인 시운영면에서 새로운 차원을 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문화예술단체의 방향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외부적, 내부적 요인이 된다. 대전미협도 90년대에 들어와 좀더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조직의 내용성을 갖추기 위해 애쓰게 되는데 95년도에 들어 대전직할시가 광역시로 또다시 변경되면서 광역시지회로 전환되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그 형식적 변모 또한 많은 부분에 걸쳐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위의 이러한 형식적 틀의 개명은 대전미협의 개칭문제에서 단순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다양화된 현대미술조류의 흡수와 함께 회원들의 내부적 교육에 맞게 내용적으로 변화되는 시점을 동시에 수반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80년대 말엽에 이미 점차적으로 개별적 자기영역으로의 전문적 세분화를 진행시켜나가고 있던 섬유와 도예부문에서 각기 창립전(대전섬유조형회 창립전, 대전도예가회 창립전)을 91년도에 개최하였으며 디자인 쪽에서도 92년 대전직할시 산업디자인전 등을 치루어냄으로써 회화위주의 조직체계의 불합리성을 개선해 나갔다. 이에 각기 장르적 영역의 정체성과 조직력의 확보는 단체전의 형태를 갖추고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후 보다 더 성격적인, 혹은 지향적 내용성에 따라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조직이 생겨날 수 있는 여지를 안겨주고 있다. 또한 사적 개별모임체의 성격이 두드러진 전시회나 그룹활동을 통해 분화되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기에 추후 미협조직이 이들의 다양화된 영역의 욕구분출의 장을 어떻게 마련해주느냐에 따라 향방은 달라질 수도 있다고 하겠다. 특히 94년 서예분과의 대전직할시 미술대전으로부터의 조직적 독립은 구체적인 예의 하나로 서예인구의 확대와 서예만이 가진 특성을 강화 발전시키는데 더욱 기여할 수 있었다. 94년 7월 20일 열린 미전 역시 예총주관에서 대전미술협회로 이관되면서 모든 것을 미협 스스로 주관, 행사를 이끌어나갔던 만큼 각 단위의 분화된 행정력의 실현은 미협 단위 차원에서도 이루어 진 셈이다. 이러한 주관능력은 95년 대전광역시 주최로 제1회 미술대전이 열림으로서 더욱 그 기능이 강화되어 갔다.

이런 외형적 조직틀의 변화는 자연 미술인들의 단결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구심점에 의해 향해지기 마련인데 93년 11월 「대전미술의 시각」의 발간은 협소한 의미의 회지역할과 기능에서 벗어나 미술이론과 평론까지 게재하여 미협회지의 모범적 선례를 남겼으며 다수 회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회원들의 일정한 주의와 열의를 지속시키고 협회단위의 행사에 적극 참여토록 유도하는데 기여하는 협회지의 발간은 이후 꾸준하고 정련화된 모습으로 정착시킨 95년도 미협지 「대전미술」로 이어진다. 90년대 상반기는 지역미술에 대한 출판작업이 활발했던 시기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흑백인쇄로 자료적 가치가 떨어졌던 미술대전 도록이 제7회(95년 9월)를 맞아 칼라인쇄로 출간해냄으로서 그 발간의미를 더했다. 또한 94년 사설화랑인 오원에서 미술정론지 형태로 본격적인 지역미술지를 발간해온 것도 대전미술계의 고무적인 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이러한 민간차원의 자극과 노력들이 대전미술계의 현안과 방향을 제시하는데 일정부분 기여해온 것이 사실이므로 이를 미협적 조직력안에서 수렴, 더욱 공론화하고 문제해별에 적극적일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과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2. 미협회원들의 성과와 주요 전시

90년대 상반기에 있었던 미협회원들의 작업적 성격은 대규모 그룹전의 형태를 벗어나고 있다는 점을 한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제 본격적인 의미의 그룹별 특징과 방향성을 읽어내고 갈래를 지을 수 있게됨으로서 대전미술계에도 미약하나마 조류와 유파를 구별, 제대로된 평가를 받을 수 있게된 것이다. 이는 기존에 사제간의 맥이 이어지는 지점에서 꾸준한 작업활동을 펴왔던 그룹전에서 한 걸음 더나아가 일정한 주제와 지향점을 일치시키면서도 각자 참여인원의 개인적 성격화가 독특한 단체전으로의 변화는 대전미술계에 일고있는 전반적 동향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작업 경향의 다양함과 함께 질적인 수준의 향상은 대전지역의 국제적인 행사와 함께 지역간의 활발한 교류전 그리고 국제적인 행사유치의 능력으로 이어진다. '93 대전 엑스포를 통해 93년도에는 더욱 활발한 국제적 행사와 성격있는 그룹전, 교류전 등 왕성한 전시가 기획되었다. 우선 개최된 교류전을 보면 '국제판화전, 한국화 동질성의 회복전, 공기전, OPUS 국제교류전, 박람과 외연전, 조각과 도예의 우정의 만남전'등을 꼽을 수 있다. 이종협, 김진회원 등의 주축으로 현대미술의 한 흐름을 포착해낸 '국제판화전'은 현대판화의 국제적 흐름을 한눈에 조망, 앞으로의 전망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또 '수채화대제전, 구상작가회전, 섬유비엔나레' 등은 지역간의 교류를 축으로 하는 행사였으며 '한일 교류전, 남부현대 미술전, 금강 자연미술제' 등은 세계적 미술 흐름을 조망하고 자체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역할을 해낸 전시회였다.

이처럼 각양각색의 국제적 전시회가 치러지는 동안 지역작가들의 개인적 활동도 그 어느 시기보다도 증가했던 때로 90년대를 성격 지을 수 있다. 특히 최영근 회원은 90년 말 이전까지 이 지역에서 보기 힘들었던 목칠공예전을 선보였다. 이는 대전지역에서 처음으로 목칠공예 개인전을 열었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또 홍명섭 회원은 제44호 베니스비엔나레 출품을 통해 지역작가의 역량을 확인받은 바 있다. 개인전뿐만 아니라 전통과 현대성과의 접속을 위한 지역 향토작가의 분발이 다양하게 일었던 단체전들은 '우정의 만남, 양기와 맥전, 대전미술 50년전'들로 기억될 것이다. 이는 지역의 전통성을 새롭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전시기획으로 기록될 것이며 우리지역성을 확인하는데 시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개인적 수상이력들을 살펴보면 90년도에는 이영래회원이 국전 초대작가로 선정되었으며, 90년대에는 가국현 회원이 회화부분에서 국전 특상을 받았고, MBC주최 아름다운 금강전에서 91년 유재일 회원이 대상을, 이영우, 박용 회원이 같은 해 국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93년도에는 상성규 회원이 동아미술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에 이종협회원은 엑스포 유공자표창상을, 최근회원도 예총공로상을, 한밭문화예술인축체에서 시장표창의 영광을 정영복회원이 누렸으며, 그리고 예총회장표창을 공광식 회원이 받았다. 정명희 회원도 그 해에 시문화상을 받은 바 있다. 94년도에는 박용 회원이 국전특선, 박병희 회원이 서울시 주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윤영자 회원은 제8회 대한민국 기독교미술상을 수상했다. 95년도에는 김진원 회원이 제7회 대한민국서예대전에서 특선을, 김배히 회원이 시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한인수 회원이 금강미술대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김배히, 유근영 회원은 오원미술에서 제정한 오원미술상을 93년, 94년도에 각기 수상하였는데 상업화랑의 대사회적 역할증대와 작가지원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일로 평가받았다. 95년도 대전일보에서 주최한 비호대상 미술부분에서 김석기 회원이 수상했으며 예술인대회 시장표창은 임양수 회원이, 예총표창은 정황래 회원이 받았다. 특히 95년도 한해에는 서예대전에서 7명이 수상했다.

90년대 상반기를 마무리하는 95년도에는 '미술의 해'로서 기억될만한 행사가 많았는데 내적으로는 그 동안 미술계 전반에 걸쳐있던 문제와 상황을 정리하고 새로운 활기를 찾아갈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된 셈이었으며 외전으로는 그 동안 경기침체로 인한 불황의 시기에도 불구하고 미술을 대중의 관심영역으로 유도,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다. 94년 유근영 회원이 전작품 호당가격 탈퇴선언으로 미술품유통에 긍정적인 활로를 찾아나감에 하나의 전거를 마련한데에 이어 95년 미협차원에서 '미술의 해'를 맞아 '한집 한그림걸기'전을 마련함으로써 전 미협회원들의 참여를 유도한 점은 사설화랑이 갖는 협소한 대전미술시장의 유통을 넓혀나가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또한 '길거리미술제'는 대중이 보다 가깝게 미술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는데 일단 미협활동의 확대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추후 좀더 계획적이고 다각적인 노력이 요구되겠지만 미술인과 일반 대중수용계층과의 거리 좁히기에 좋은 사례를 남겼다 하겠다.

이외에도 95년, 이신회가 '전국구상연합전'을 개최한 것은 이 지역 미술을 전국적 단위로 그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대전지역의 한 단체가 전국 구상작가들의 현단계를 검토해 볼 전시회를 기획하고 치뤄낼수 있었음은 그만큼 역량이 성장해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95년 3월 21일 예총시지회 주관으로 개최된 '대전문화의 활성화와 그 방안'이란 주제로 열렸던 문화예술인 워크샵 또한 대전문화예술의 방향성을 학계, 언론인, 공무원, 예술인 등 다양한 계통의 종사자들이 모여 함께 진지하게 논의하고 모색했다는 점에서 여러 미술단체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 세미나는 95년 5월에 있었던 '대전시립 미술관 건립방향 모색을 위한 대담회'(오원화랑 주최)처럼 지자제 선거를 앞두고 지역문화 예술에 올바른 정책입안과 미술인들의 의사전달을 위한 소통통로를 활발히 만들 어나가고자 했던 점에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이제, 그 동안 대전미술계의 숙원사업중의 하나였던 대전미술 50년사가 미협의 역사를 중심으로 그 활동내용을 밝히는 「대전미술의 어제와 오늘」이란 책자로 발간됨은 대전미술의 그 뿌리와 오늘날의 모습까지를 관통하고 있는 역사성과 위상을 검증하고 확인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90년대 상반기는 지자제 실시와 더불어 미협조직의 형식과 내용성이 큰 폭으로 조정, 증가되었던 때로서 개인이든 단체이든 외부 즉 국내외적 행사와 자극으로 고립적인 대전화단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시기였다. 자생적인 성장기와 발전기를 거쳐나오는 동안 대전만이 아닌 타 지역(국내의 어느 지역이든, 외국과의 교류이든)과의 물꼬를 트며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현대성에 맞닥뜨린 90년대의 대전미술은 그 자극과 충격을 서서히 내적으로 수용, 체계화시켜나가고 있다. 양적인 풍요로움의 열기가 다양함이라는 그리 적절치 못한 단어로 판결 날지도 모를 90년대 상반기를 접으며 남은 시기의 미래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 보려함은 아직도 대전미술계의 성장력이 낡은 시대의 신화재생에 있지 않음을 많은 이들이 믿고있기 때문이다.

 


 

3. 90년대 하반기를 기대하며

앞에서도 짧게 언급했듯이 90년대 대전미술계는 자신의 잣대로만 자신을 재단하기에는 그 정치가 커져버린 상태이다. 뚜렷한 정체성을 찾기 위해 애쓰는 동안 대전미술은 밀물처럼 쏟아져 흘러 들어오는 외부의 현란한 몸짓에 눌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 자신의 키와 몸무게를 타자의 그것과 비교함에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하루아침에 국제미술계와 면대하고 부지런히 몸단장하며 낯빛을 밝혀야 했으며 행여 뒤질세라 자신의 몸보다도 더 큰 옷을 입어야 하는 때가 많았다. 그라는 동안 정작 소홀히 한 것은 대전미술계 내부에서 자라나오는 진정한 주체성 확립에 대한 요구와 시급한 현안들에 대한 뚜렷한 해답 마련이었다. 이제 대전미술은 그 양적발전에 자족하거나 머물러 있어서는 도저히 여러 기대치를 충족시킬 수 없는 단계에 와있다. 진정한 질적인 발전을 위해 우리들이 남겨놓고 있는 과제를 살펴보는 동안 90년대 하반기에 대한 기대도 확실해지리라 본다.

우선, 90년대 미협조직의 내용성이 보다 다각화될 필요성이 있다. '95년 대전광역시 민선 시장을 낳은 지자체 선거이전 이긴하나 95년은 한국미협 대전광역시지회로 출범한 김치중 회장단의 새로운 여러 시도가 있었던 해로 이후 미협조직의 확대와 발전을 위한 방향성 마련에 청신호가 내비치고 있다. 그 동안 자주 불협화음을 일켰던 회장단과 이사들간의 목소리를 한곳으로 집중, 통일시키기 위한 노력들이 화합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여러 의견들이 조정 통합되도록 여론수용과 의사소통의 활로를 트는데 긍정적인 기여가 되었으면 하는게 미협회원들의 바램이다. 이 부분에서 미협조직이 보다 큰 포용력을 지닐려면 소극적인 방관자로 자의반 타의반 소외되어 있는 회원들을 적극 참여의 장으로 끌어내야 할 것이며 주체적인 미협회원들의 활동을 유도 고무해야 할 것이다. 단순한 친목도모나 행사를 보다 더 잘 치르기 위한 조직이라기보다는 지방자치제에 맞는 구체적인 미술인들의 이익과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조직으로 바뀌어야 함이다. 미술인들의 정치적 참여는 문화예술행정에 보다 합리적이고 능률적인 행정법안화가 되도록 적극적인 의사전달을 의미하는데 이는 대전시립미술관 건립을 둘러싼 여러 문제들에 관해서 우선적으로 얘기될 수 있다. 대전시립미술관이 대전지역민의 예술문화향수에 기여하는 지역미술인들의 활발한 참여속에 제대로된 모양새를 갖추고 실제의 내용을 풀어나갈려면 무엇보다도 지역미술인들의 주체적 참여가 요구된다. 미협의 조직적이고 체계성있는 제시와 방안은 전 미협회원들의 의사를 공정하게 수렴하는 가운데 생겨날 수 있는 것으로 여러 방법론이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미협조직의 변화는 앞으로 더욱 다양해지고 양적으로도 증가할 국제적 교류와 진출에 보다 기획력있게 대응하려면 조직의 가변력도 탄력있게 유지되어야 할 것이며 개인이나 소수 단체차원에서 해내기 어려운 것들을 조직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노력들도 적극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협차원에서 독립적이면서도 확대된 재정마련을 위한 방법들이 논의되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는데 문예진흥기금뿐만 아니라 시예산안에서의 확보와 지원을 받아낼 수 있는 방안이나 지역거업체에 대한 메세나 운동등의 다각적인 길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이제 다시 조직을 이끌어갈 미술인들로 돌아와 생각하면 90년대 하반기를 맞는 대전미술인들에 대한 기대는 역시 작품성에 있다. 대전화단이 해방이후 본격적으로 형성, 성장, 그리고 발전을 거듭해오고 있는 동안 대전미술계가 가진 양식적 특징과 개성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추후 좀더 거론할 사항이겠으나 지역화단만이 가진 정체성과 역사성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하는 것은 언제나 되물어도 풀리지 않는 질문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것도 자칫하면 민족성과 전통성의 문제를 고답적이고 상투적인 형식성 안에서 바라보게 될 염려가 있듯 대전지역만이 지닌 특성을 찾아내고 키워나가야 함도 역시 고립적이고 소모적인 형태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닌(물론 무분별한 현대 예술에의 맹목적 집착으로 인한 파행적이고 비주체적인 모습도 여기저기서 보인다.) 진정한 자기모습 찾기에 대전 미술인들의 정진이 어느 때보다도 요구되고 있다.

넘어야 할 강폭이 넓을수록 강 건너 들판은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 많은 문제가 산적할수록 전망은 투명하다. 해결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90년대 하반기의 대전 미술계발전을 기대하는 많은 이들의 손들이 벌써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새로운 미술의 해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

 

변상형
「대전미술의 시각」 편집위원역임 / 한남대, 공주교대 강사
홍익대학 미학과 대학원 졸 / 원광대학 박사과정

 

상호 : 대전광역시지회 한국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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